Ep 1. 코로나 이전의 소소한 행복
일주일에 한번, 금요일 저녁마다 퇴근 후 격렬한 취미활동을 즐기기 위해 사당역 근처 연습실로 발걸음을 옮긴다. 오늘따라 사람들이 다들 연습복을 검은색 계열로 맞춰서 입고 왔다. 나도 검은색 상의, 검은색 레깅스 차림이다. 짙은 민트색 계열의 연습실 배경이 검은색과 대비되어 더욱 또렷하게 눈에 들어오는 날이다. 어쩐지 민트향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수업이 시작되면서, 왠지 모르게 코끝을 휘감던 (아마도 내 상상 속에서 나온) 민트향은 커다란 동작들과 숨을 몰아쉬는 소리, 땀 냄새와 함께 휘발되고 만다. 가끔 트레이너 선생님이 워밍업으로 다리 찢기라도 하는 날에는, 여기저기서 비명 소리가 들려온다. 그럴 때마다 ‘나는 절대 비명을 입밖으로 내지 않겠다’고 다짐한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스트레칭을 시도하지만 어느새 그런 다짐은 나도 모르는 새에 작은 비명으로 바뀌어 있다. 일상
본격적으로 오늘의 안무 진도를 나가는 시간, 젊은 여자 선생님이 걸스힙합 장르로 안무를 짜 오셨다. 오늘 오신 선생님의 안무 스타일은 내가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스타일이다. 학생일때부터 직장인이 된 지금까지 춤을 추긴 했지만, 전문 댄서가 아니라 그저 취미로 하는 아마추어인 데다가 탄탄한 기본기까지는 보유하지 못한 나는 비트를 굉장히 잘게 쪼개는 안무나 고난이도의 안무는 어려워하는 편이다. 대신 동작이 좀 크고 느낌을 살리는 안무를 배우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게 느껴진다. 어차피 느낌은 개개인의 몫이니까, 안무의 스타일을 살리면서 내 느낌을 최대한 담을 수 있도록 연습, 또 연습한다.
오늘따라 선생님이 선택해온 곡과 안무가 마음에 쏙 든다. 트렌디하기도 한데, 몸에 착착 배이는 동작들이라 그런지 유독 잘 외워지는 것 같다. 사실 나는 안무 외우는 속도가 그렇게 빠르지 않다. 그렇지만 내가 좋아하는 곡에, 어느정도 익숙한 스타일의 동작이 많이 들어가 있으면 외울 때 가속도가 붙는다. 오늘따라 이 곡과 안무가 그렇다. 느낌 좋은데, 오늘은 선생님 픽(pick)을 기대해봐도 되겠어, 라고 생각하면서.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떤 선생님들은 수업의 마지막에 수강생 몇 명을 ‘픽’해서 함께 영상을 찍는다. 그 날 수업에서 안무를 가장 잘 외웠거나, 느낌을 잘 살리고 있는 사람들이 그 날의 픽을 당할 가능성이 높다. 수업의 막바지 순간, 조별 촬영까지 끝난 후 괜히 가슴이 두근두근한다. 선생님이 연습실 안을 휙 스캔한다. 그리고 결정의 시간.
“여기 이렇게 여자분 둘, 저기 남자 한 분, 그리고 여기 여자분 둘 나오세요.”
선생님 손이 분명 날 가리켰다. 기분이 훅(!) 좋아지면서 두근거림의 강도가 더 올라간다. 오늘 수업 열심히 들은 보람이 있구나, 실수하지 말아야지. 선생님이랑 다른 네 명의 사람들이랑 카메라 앞에 선다. 오랜만에 당한(?) 픽이라 기분이 좋은지 텐션이 마구 올라간다. 실수없이 영상 촬영을 잘 끝냈다. 기분이 좋다. 영상을 받아보니 온통 다 검은색 의상인 사람들만 픽을 당했다. 심지어 선생님도 검은 색 옷차림이다. 온통 까망까망한데 괜히 오늘따라 검은색이 이뻐보인다. 오늘 수업도 정말 재밌었다. 선생님 픽을 당한 날이라 더 신이 났다. 그리고 수업이 끝난 후 짐을 주섬주섬 챙기며 다짐한다, 앞으로도 검은색 연습복을 챙겨 오리라고.

Ep 2. 집콕라이프에서 찾는 행복
주말 아침, 게다가 월요병이 찾아오려면 아직 24시간 이상이 남아있는 토요일 아침이다. 늘어져라 늦잠을 자고 싶기도 한데 어쩐지 열시밖에 되지 않았는데 눈이 떠졌다. 이 꿀 같은 토요일을 잠으로만 낭비하지 말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충만하게 누리라는 신호인 것인가. 세수를 대충하고 부엌에 어슬렁어슬렁 걸어간다. 뭘 먹어야 이 행복한 토요일에 잘 먹고 잘 살아냈다고 소문이 날까. 냉장고 안을 들여다보니 엊그제 SSEUK배송으로 도착한 양파, 양송이 버섯, 빨간 파프리카가 냉장고 맨 밑 채소 칸에 있고, 그 위에 있는 칸에는 비닐팩에 담긴 마늘, 그리고 썰어서 말려놓은 가지가 있다. 냉동실에는 얼마전에 감바스를 해먹고 남은 깐 새우가 몇 마리 있다. 아, 그러고 보니 찬장에 있는 파스타 면이 있는 게 기억났다. 올리브유도 넉넉하게 있다. 바질, 파슬리, 후추 등등 양념통들을 쳐다보다가 오늘의 메뉴를 정했다.
첫 번째로 할 일은 나의 베스트 요리 선생인 You튜브를 틀어 레시피를 확인하는 일이다. 그리고 나서 본격 요리에 돌입한다. 도마에 씻은 채소들을 놓고 송송 썬다. 양파를 채썰고, 양송이는 옆으로 송송, 파프리카는 반으로 갈라 씨를 긁어내고 깍둑 썰어준다. 마지막으로 마늘을 얇게 썰어주면 재료 손질이 끝난다. 냄비에 물을 넣고 끓이기 시작한다. 끓는 물에 면을 넣고 소금을 한 꼬집 집어넣는다. 이렇게 하면 면이 더 쫄깃해진다나. 동시에 옆 가스불 위에서는 둥근 프라이팬을 올리고 올리브유를 넉넉하게 부어준다.
올리브유에 기포가 슬슬 올라오기 시작할 때쯤 마늘과 양파를 투하한다. 마늘과 양파가 살짝 튀겨지면 옆에서 삶은 면을 가져와 프라이팬 안에 넣고 센 불에 빠르게 익힌다. 면이 익을 때쯤 양송이, 가지, 새우를 넣는다. 중간중간 재료들이 골고루 익도록 뒤집고 소금과 후추를 솔솔 뿌려서 간을 맞춘다. 새우가 살짝 익으면 파프리카를 마지막으로 넣고 잠깐 더 익힌 뒤에 불을 끈다. 그리고 볼록한 예쁜 그릇에 담아내면 내가 좋아하는 온갖 재료들이 들어간 새우 오일 파스타가 된다. 노란 파스타면 위에 가지와 파프리카로 예쁘게 색감을 잡고, 양송이 버섯과 새우가 올리브유와 어우러져 고소하다. 마늘과 양파는 느끼함을 잡아준다. 오랜만에 주말 특식 만들기에 성공하니 기분이 매우 좋아졌다. 지난 한 주 동안 고생하며 심히 힘들어진 몸과 마음을 위로받는 것 같다. 그래, 힘든 날이 있어야 좋은 날도 있는거지, 어떻게 만날 좋은 날만 있겠어, 라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가끔 행복이란 무엇일까 생각한다. 뭘 하고 살아야, 아니 어떻게 살아야 행복할까, 라는 밑도 끝도 없는 고민을 한다. 그렇지만 행복이 별 거 있나. 가지와 함께 돌돌 만 파스타를 입 안으로 들이밀다가 문득 아, 이런게 행복이지, 라고 머릿속으로 중얼거려 본다. 시계를 보니 열한 시가 훌쩍 넘어있다. 아침 겸 점심을 먹었으니 한 서너시쯤이면 또 슬슬 배가 고파지면서 또 메뉴 고민을 하게 되겠지. 그땐 어떤 음식이 이렇게 또 소소한 행복을 가져다줄까.

새로운 것들을 접하다가 익숙하던 것들이 그리워지던 찰나에 돌아온 여행. 좀 더 즐기고 더 많이 볼걸 하는 아쉬움과 무사히 돌아왔다는 안도감이 교차하는 밤.

생각보다 나는 낯선 곳에서 잠을 깊게 자지 못했고, 예상 외로 낯선 곳에서 종이지도 한 장으로 길을 잘 찾아다녔고, 예전과는 다르게 낯선 음식과 물 때문에 탈나지 않았고, 생각보다 처음 본 이들과 잘 지내기도 했고, 잘 못 지내기도 했다.

국제 미아가 되지 않으려고 길을 조금만 몰라도 열심히 물어보고 다니는 내 모습에 새삼 놀라기도 했고, 친절한 현지인들에게 감사해하기도 했다. 하루가 끝나면 피곤에 지쳐 사진 업뎃은 마음처럼 빠릿빠릿하지 않았다. 생각보다 동유럽은 아름다웠고, 마지막 체스키와 부다페스트에서의 나홀로 일정은 쓸쓸하기도 했지만 고요하고 평안한 그 침묵을 깨고 싶지 않기도 했다.

길고 짧은 여행에서 일상으로 돌아와 그리웠던 것들과 재회하는 동시에 이제 다시 현실을 살아낼 준비를 한다. 눈앞에 닥칠 일들, 겪어내고 감당해야 하는 것들이 빤히 보이기에 도망치고 싶지만 이것들도 곧 지나가리라. 방금 끝나버린 이 여행처럼.

-유럽여행에서 돌아온 다음 날, 2016년 7월 16일 이른 새벽

 

여행에서 돌아온 바로 다음 날의 이른 새벽, 시차적응이 안되어 깨어났을 때 문득 여행에서 느낀 소회를 기록해놔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곧바로 폰을 들고 여행하면서 느꼈던 감정들과 생각들을 줄줄 써내려갔다. 새벽감성 덕분이었는지, 여행하는 동안의 기억과 느낌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르면서 글이 술술 나왔던 것 같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그 동안의 여정과 기억들을 떠올리고, 또 그 후에 다가올 일들에 대해 마음을 다잡으며 다짐했던 것들이 어느샌가 머릿속에 저런 내용으로 죽 정리되어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대학원 다니면서 방학에 유럽 단기 써머스쿨을 다녀온 적이 있다. 체코 프라하에서 일주일 가량 머물면서 써머스쿨을 수강했고, 스쿨 일정 앞 뒤로 각각 며칠 동안 유럽의 몇몇 도시를 돌아다녔다. 인생에서 첫 유럽여행이기도 했고, 총 2주 반 가량의 기간 중 써머스쿨 기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절반을 혼자 다니는 여정이라 설렘 반 두려움 반으로 비행기를 탔었다. 그렇게 다녀온 유럽에서의 여정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서 블로그를 시작하기도 했다. 이때 나의 여행은 미리 준비해갔던 유심이 불량이었던 덕분에(?) 가이드북의 종이지도와 현지인들의 친절한 안내에 거의 99%를 의존했던 기억이 있다. 그럼에도 첫 유럽행에 신이 났다. 때로는 더위에 힘이 부쳐 카페에 앉아 쉬기도 했고, 그러다가도 좀 더 많이 보고싶다는 마음에 아픈 다리를 이끌고 몇시간을 걸어다니면서도 힘든 줄을 몰랐다. 

혼자 떠났던 여정은 조금 불편하기도 하고 외롭기도 했다. 예를 들면 카페나 식당에서 화장실을 다녀오고 싶은데 짐을 봐줄 사람이 없다거나(우리나라처럼 카페에 노트북, 책, 핸드폰 등등 소지품 놓고 다니면 큰일남..), 맛집을 찾아서 메뉴를 여러 개 시켜보고 싶은데 그럴 수 없을 때는 혼자인게 조금 아쉽기도 했다. 헝가리 부다페스트 마지막 날에 숙소 근처에 있는 굴라쉬 맛집을 찾아갔는데, 다른 메뉴를 시켜도 어차피 많이 먹을 수가 없을 것 같아 굴라쉬와 빵만 주문해서 먹고 나왔을 때가 제일 아쉬웠다. 

그렇지만 혼자 하는 여행은 나름 재미있었다. 같이 여행 가서 모든 일정을 함께 한 사람은 없었지만, 대신 새로운 사람들과 뜻밖의 인연을 맺기도 했다. 파리에서는 한인민박집에서 만난 동생과 함께 하루 종일 파리 시내를 돌아다녔고, 나중에는 한국에 돌아와서 조우하기도 했다. 또 그 당시에 파리의 한 게스트하우스에서 일하면서 머물고 있던 아는 동생과 약속을 잡아 노트르담 성당 앞에서 만나기도 했다. 마침 내가 간 파리에 한국에서 알던 동생이 머물고 있었다니, 그것도 생각하면 참 신기한 일이다. 신기했던 일은 또 있었다. 파리의 민박집에서 만난 다른 동갑내기 친구는 그 당시 프라하의 한 예술 학교에서 유학을 하고 있었다. 그 친구와 파리에서 연락처를 주고 받은 뒤, 나중에 프라하에서 써머스쿨 일정 중간에 한 번 만나 저녁을 같이 먹기도 했다. 프라하에서 써머스쿨 일정이 끝나고 나서 혼자 체코의 소도시 체스키크롬로프를 갔을 때는 같은 민박집에서 만난 중국인 언니 두 명과 함께 체스키 시내를 돌아다녔다. 첫 유럽행이 혼자라서 외롭다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돌이켜보니 새로운 사람들과 인연을 맺은 소중하고 특별한 추억들이 남아 있었다. 

거의 종이지도 한 장에 의존해서 돌아다니니 현지인들에게 길을 물어봐야 하는 상황도 종종 생겼다. 파리에서 한 파리지앵에게 프랑스어로 길을 물었는데, 내가 어찌나 버벅버벅했는지 그 사람이 영어로 답을 해주었던 굴욕적인 기억이 있다.(ㅠㅅ ㅠ..) 약간 기가 꺾였지만 내 발음을 프랑스인들이 알아들을 때까지 시도해보리 라는 꽁-한 오기를 가지고 꿋꿋이 프랑스어로 길을 묻고 다녔고, 결국 몽마르트 언덕과 물랑루즈를 보고 나서 숙소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한 친절한 릴(Lille) 출신의 프랑스인 아주머니와 프랑스어로 더듬더듬 대화를 이어갔던 기억이 있다. 그분은 다행히도 내 프랑스어를 끊지 않고 참을성 있게 잘 들어주었다. 답도 다른 언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해주었다. 지금 생각하니 그걸 용케 알아들었던 나 자신이 신기하다. 그 아주머니는 파리에 잠시 왔다가 지방으로 돌아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북역(Gare du Nord)에 가는 길이라고 했다. 

체스키크롬로프에서 숙소를 찾아갈 때는 길이 좀 어려웠는데, 홀로 사이클링을 하던 남자분이 지도를 보고 나를 친절하게 숙소 앞까지 데려다 주었던 기억이 있다. 마지막 행선지인 부다페스트에 도착했을 때에는 해가 져서 거의 밤이 되어 있었다. 깜감해진 데다 정류장에서  미리 알아보고 간 버스의 노선이 보이지 않아 당황했던 나는 같은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한 여자분에게 숙소 이름을 대면서 여기를 가는 버스를 검색해달라고 부탁했고, 그 분은 자기가 탈 버스를 놓치면서도 친절하게 내가 탈 버스를 알아봐주고 내가 버스를 탈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헝가리 사람들이 대체로 좀 표정이 없달까, 약간 무뚝뚝해보이는 면이 있는데, 내가 만난 헝가리 사람들은 외국인인 나에게 대체로 친절했다. 

혼자였던 시간이 많았던 첫 여행에서는 스스로 헤쳐나가야 할 일들이 많았다. 혼자이기에 밤늦게 돌아다니지 않고 가방은 항상 앞으로 꼭 메고 다니는 등 안전에 유독 신경을 썼고 덕분에 유럽에서 많이들 당한다는 소매치기는 한 번도 당하지 않았다. 인종차별적인 언사를 들은 적은 별로 없었지만 딱 한 번 '유럽에 인종차별이 존재하긴 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프라하에서 체스키크롬로프로 간 첫 날, 한 무리의 백인 남자들이 우르르 옆을 지나가다가 나를 쳐다보면서 자기들끼리 큰소리로 뭐라뭐라 떠들고 웃는 모습을 봤다. 너무 노골적으로 나를 쳐다보는 바람에 그 조롱의 대상이 나라는 것을 모를 수가 없는 상황이었고, 헝가리 말이라 알아들을 순 없어도 뭔가 나를 괄시하고 놀리는 듯한 대화라는 건 느낌으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이게 말로만 듣던 인종차별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예상외로 침착하게 그 옆을 통과할 수 있었는데, 그건 아마 대화의 내용을 정확히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못 알아들으니 굳이 신경을 쓰지 말자는 생각이었나. 여튼 처음 겪는 인종차별적인 행동 앞에서도 의외로 나는 담담했고, 그냥 개무시(!)를 했던 덕분에 마음을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그렇게 홀로 여행을 하면서 발견한 나는, 처음 만난 사람들과도 생각보다 어색하지 않게 지낼 수 있는 사람이었고, 모르는 길이 나오면 버벅대는 대신에 바로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길을 물을 수 있는 용감무쌍한(?) 사람이었다. 국제미아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건다는 두려움을 압도해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ㅎㅎ.. 하루에 여덟 시간을 뚜벅이로 돌아다녀도 생각보다 지치지 않았던 의외의 강철체력을 발견하기도 했다. 너무 힘들면 잠시 쉬었다가 다시 일어날지언정, 많은 것을 눈에 담고 지금 보이고 들리는 모든 순간을 놓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정말 열심히 돌아다니는 열정적인 나의 모습도 발견했다. 한국에서 출발하던 날 공항까지 따라오셨던 엄마는 처음으로 혼자 보름 넘게 해외로 나가는 딸래미 걱정을 한 가득 하고 계셨지만 나는 너무나 안전하게, 그리고 혼자서도 신나게 여행을 즐기고 왔다. 

여행은 나의 새로운 면모, 나 자신도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나의 다른 면모를 발견하게 해주었다. 나는 안전에 대한 주의는 늘 하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늦게까지 그리고 구석구석을 돌아니면서 새로운 것들을 보고 싶어하는 적극적인 사람이었고, 낯선 곳에서도 여러가지 수단으로(종이지도와 현지인 sos) 길을 찾아다니며 생존본능과 현지 적응력이 강한 사람이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덕분에 어딜 가든 국제 미아는 될 것 같지 않다는 자신감이 생겨서 그 뒤도 또 혼자서 해외여행을 다녀왔다.(지금은 갈.. 수.. 없는.. 오키..나..와...) 내가 어디서든 잘 돌아다닐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 그것이 내가 그 뒤로도 가끔 여행을 훌쩍 떠나는 이유가 아닌가 한다. 또 덕분에 언젠가는 먼 곳, 예를 들면 쿠바나 모스크바 같은 도시들을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기도 했다.(말은 통하지 않아도 국제미아가 될 두려움은 없으니 어디든 갈 수 있다!)

무엇보다도 여행이 좋았던 건, 낯선 곳으로 떠나 새로운 것들을 보고 듣는 지금 이 순간 혹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비행기 창문을 바라보는 순간조차도 모두 충실하게 즐기는 법을 배울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는 점이다.  날마다 이어지는 기다란 일상의 길이에 비하면 아무리 긴 여행의 길이도 참 짧게 느껴진다. 그 시간을 온전히 즐기는 법, 그리고 또다시 일상을 살아나가다가 모든 것이 지리해질 때쯤 잠시 모든 것을 접어두고 훌쩍 떠날 줄 아는 여유를 가지는 것, 그것은 여행이 나에게 가르쳐준 하나의 삶의 방법이었다. 꼭 멀리 떠나지 않아도 마음을 달랠 수 있는 곳으로 나 자신을 데려가기도 한다. 분주하고 힘든 일상을 가끔은 잠시 한 걸음 밖에 나와서 바라보게 해주는 것이 바로 여행이었다. 그렇게 본다면 여행은 어떤 중요한 일이나 고비를 한 차례 겪고 난 후에, 마음을 달래고 치유할 수 있는 좋은 방식이 아닐까. 올 해에도 그리고 그 다음해에도 그렇게 할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해본다. 

살롱 드 모모 - 토크콘서트, 봄 <영화로 보는 남북, 그리고 분단 이야기 -강철비를 중심으로>

지난 주 금요일(3/27) 평화교육 시민단체 피스모모에서 진행하는 토크콘서트를 다녀왔다. 피스모모에서 살롱 드 모모라는 이름으로 진행하는 토크콘서트는 계절별로 1회씩 열린다. 이번 봄 시즌에는 우리나라 영화에서 나타나는 남북관계와 분단 이야기를 주제로 토크가 진행되었다.

피스모모는 <서로가 서로에게 배운다>라는 모토로 평화교육을 진행하는 시민단체다. 이전에 일하던 기관에서 진행하는 평화교육을 같이 하던 단체이기도 하고, 아는 분이 지금 여기 속해 계시다고 해서 나도 모르게 ‘어쩌다보니’ 인연이 닿아 있던 곳이기도 했다. 우연히 행사 참가 신청 링크를 그 ‘아는 분’의 남편 분께서 sns에 공유해놓으신 걸 보고(세상은 정말 좁다), ‘요즘 시간도 많은데 여기나 가볼까?’라는 마음에 덜컥 신청을 하고 다녀왔다. 정우성, 곽도원 주연의 영화 '강철비'의 양우석 감독 그리고 유지나 영화평론가가 게스트로 와서 강철비와 남북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자리였는데, 사실 난 영화를 보지 않은 상태에서 참가했다. 신청하고 바로 다음날 가야해서 영화를 미처 볼 시간이 없었다.^^; 그래도 평소 관심사 중 하나였던 남북관계와 영화라는 장르 자체에 대한 내용이 베이스로 깔려있어서 토크콘서트 내용을 이해하는 데에 무리는 없었던 것 같다. 다만 영화를 보고 갔으면 등장인물이나 특정 신에 대한 더 심도 깊은 이야기나 질문을 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긴 했다.

영화 강철비의 양우석 감독과 동국대학교 교수인 유지나 영화평론가가 이야기 게스트로 참여했고, 영화 강철비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한국 영화가 남북관계를 어떤 식으로 스토리에서 활용해 왔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리고 두 분의 이야기가 끝난 후에는 청중들과의 Q&A 시간도 있었다. 생각보다 토크시간이 길어져서 사실 기억이 다 나지는 않는다^^;; 그리고 행사 뒤에 집에 돌아와 영화를 봤는데, 영화를 보고 나니 콘서트에서 나눈 이야기가 더 이해가 되는 부분도 있었다. 그런 부분까지 종합해서 토크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포인트 몇 개만 짚어보고자 한다.

1. 현실인식 기반 스토리 (※주의 - 영화 강철비 결말 스포가 있음)

양우석 감독이 영화 강철비를 기획하게 된 배경과 의도를 듣고 ‘정말 치밀한 사람이구나.’ 했다. 웬만한 역사학자, 국제정치학자 못지않은 세계사, 핵의 역사에 대한 지식을 줄줄 읊으며 영화 기획 배경을 설명하는데 잠시 학부 때 국제정치 시간으로 돌아가는 줄 알았다.(심지어 명강의..:D) 저 정도는 치밀해야 영화감독을 하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여하튼 박식함과 치밀함이 엄청난 사람이었다.

양우석 감독은 국제정치학자들이 가장 현실가능성이 높다고 꼽는 한반도의 미래 시나리오 네 가지를 제시했다. 네 가지 시나리오는 바로 1.전쟁 / 2.(북한 정권의 붕괴를 예상 결말로 상정한) 경제 제재 / 3.북한의 자발적 비핵화 / 4.남한이 북한의 핵을 공유하여 한반도 전체가 핵무장 이런 내용이었다.

나는 그 당시에 영화를 보진 않았지만 같은 테이블에 앉아있던 분들에게 영화가 이 네 가지 옵션 중 마지막을 결말로 택했다고 들었다. 영화에서 왜 한반도의 핵무장을 결말로 넣었을지, 감독이 그 옵션을 가장 현실가능성이 높거나 긍정적인 결말이라고 여겼던 건지 궁금했다. 그리고 감독이 생각하는 또 다른 한반도의 시나리오에는 어떤 것이 있을지 궁금했다. 어쨌든 영화를 현실을 기반으로 하더라도 일종의 픽션이니까, 영화적 상상력을 가미해서 좀 더 긍정적이고 희망찬 한반도의 미래를 그려볼 수는 없었을까? 그런 의문을 가지고 청중과의 질의응답 시간에 양우석 감독에게 질문을 던졌다. 양우석 감독은 자신은 철저하게 현실인식에 기반을 두고 영화를 기획했고, 영화는 어떤 대답을 던져주기 보다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이나 현상을 사람들에게 상기시키고 생각해볼 수 있게 질문을 던지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는 대답을 들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가 결코 전쟁으로부터 안전한 지역이 아니고, 2017년 당시에는 정말 국제정세를 보아 한반도에서 정말 전쟁이 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우리 사회가 전쟁에 대한 인식이 많이 무뎌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영화 결말을 어떻게든 최대한 긍정적인 쪽으로 끌고 갔는데 괜히 억지스러운 결말로 끝냈다는 생각이 들어서 사실 좀 후회한다는 얘기도 했다. 감독의 기획의도를 알고 나니 영화의 결말에 수긍이 갔다. 한반도가 전쟁가능성이 있는 지역임은 분명 사실이니까. 어쩌면 우리에게 평화 감수성이 가장 필요한 이유는, 굳이 IS 같은 테러단체가 활동하는 지역까지 보지 않아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한반도의 정세만 둘러봐도 알 수 있지 않을까.

2. 분단 트라우마

분단은 남한과 북한 모두에게 뼈아픈 상처와 풀기 어려운 숙제를 남겼다. 사실 감독의 또 다른 의도는 이 분단 트라우마를 보여주고자 함도 있었다. 이산가족과 같은 인도주의적인 문제에서부터 통일 혹은 현상 유지, 그리고 통일을 바라보는 남한 내의 정치적 문제까지, 복잡하게 얽혀서 어디서부터 풀어가야 할지 모르는 실태래 같은 문제를 떡하니 던져 놨다. 유지나 영화평론가와 양우석 감독 모두 짚고 넘어간 ‘분단 트라우마’는 분단 그 자체보다 심각한 문제이다. 누군가에게 분단은 가족과의 생이별, 형제에게 총부리 겨누기와 같은 지극히 인간적인 비극을 상정한다. 하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분단 상황을 이용해서 어떤 이익을 얻을 수 있을지 궁리한다. 양우석 감독은 현재 우리 사회가 철저히 이익 사회로 돌아가고 있다고 했다. 분단과 같은 중차대한 민족의 문제와 아픔까지도 이익을 얻기 위한 수단이 되고 있음을 지적하며 영화에서 우리나라의 정치인들뿐만 아니라 한반도에 개입하는 여러 국가들의 행위와 결정도 결국 한반도의 분단 상황을 극복하기 위함보다는 자국의 이익을 기반으로 이뤄진다는 점을 말하고자 했다고 전했다.

3. 영화 자체에 대한 여러 가지 질문 - 젠더감수성

피스모모 문아영 대표가 마지막으로 던진 질문이 영화 강철비에 여성의 역할이 보조적으로 혹은 매우 제한적으로 그려졌는데 이 부분에 대해 감독은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것이었다. 양우석 감독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외교, 정치 분야에서 아직까지는 여성의 진출이 적고, 본인이 남북관계와 같이 전통적으로 그리고 아직까지도 남성이 주도하는 분야를 그려내다 보니 여성의 역할이 크게 드러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사실 나중에 영화를 보면서 이건 참 감독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외교관 중 여성의 비중이 50%를 돌파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여전히 대외정책이나 사법, 정치, 경제 내의 주요직에는 여성들에게 유리천장이 존재하는데, 철저하게 현실을 그려내고자 하는 양우석 감독의 영화에서 여성의 역할이 그리 크지 않게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감독은 그렇지만 자신도 젠더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젠더 문제와 관련된 영화 시나리오를 틈틈이 작업하고 있다고 했다. 투철한 현실인식을 가진 양우석 감독이 언젠가 영화에서 젠더 문제를 어떻게 그려낼지 기대된다.

덧) 어쩌다보니 양우석 감독에 초점을 많이 둔 포스팅이 되었는데, 유지나 평론가에 대해서도 느낀 점을 떠올려보자면, 약간 독특한 캐릭터를 가진 분이라는 점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나도 내심 지향하는 캐릭터지만 정작 나 자신이 그렇게 되기는 참 어려운... 평화운동을 지속해왔고, 인권 문제에 관심이 많으며 모든 종류의 폭력에 반대하기에 때로는 국가라는 절대 권력이 휘두르는 폭력에도 저항하며 아나키스트적인 성향을 뿜어내기도 하는, 자유로운 영혼이 좀 더 그분의 캐릭터에 가까운 단어일 것 같다. 보통의, 정말 보통의 평범한 나 같은 소시민(?)은 현실을 살아내는 데에 바빠 급급해서 지나치는 일들도 사유하는 사람인 것 같다. 그런 사람을 사실 좋아하면서도 내색하기가 쉽지 않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이 소심한 거북이 주인장은 어떻게 하면 튀지 않으면서도 명예나 지위는 얻고 안정적이면서 안락한 삶을 살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을 주로 하는 정말정말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서... 그래도 이런 주제의 토크콘서트가 있으면 좀 기웃거려 보기도 하고 관심 가지고 요러케 포스팅도 좀 올려보고.. 이런 관심이라도 꾸준히 가져보면 좋지 않을까..? :) 

2월 중순 넘어서야 써보는 거북이 주인장의 새해결심. 

1월부터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퇴사와 이직을 위한 시험준비 등등으로 정신이 없었다..

드디어 어제, 준비했던 시험이 끝나고 다시 블로그를 슬금슬금 들어왔다. 

올 해 계획은 사실 어디로 이직을 한다거나, 무슨 일을 한다거나 하는 구체적인 계획은 아니다. 

한 마디로 별거 없다 ㅎㅎㅎㅎ 

별거 없지만 가장 중요할 것 같은 

삶의 태도를 몇 가지 적어보았다. 

2019년에는 좀 더 침착하게, 겁먹지 말고, 

할말은 당당하게 하고, 

스트레스 덜 받는 법을 익히고, 

마음먹은 일은 행동으로 옮기고,

주변을 좀 더 돌아보며 사랑하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