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 코로나 이전의 소소한 행복
일주일에 한번, 금요일 저녁마다 퇴근 후 격렬한 취미활동을 즐기기 위해 사당역 근처 연습실로 발걸음을 옮긴다. 오늘따라 사람들이 다들 연습복을 검은색 계열로 맞춰서 입고 왔다. 나도 검은색 상의, 검은색 레깅스 차림이다. 짙은 민트색 계열의 연습실 배경이 검은색과 대비되어 더욱 또렷하게 눈에 들어오는 날이다. 어쩐지 민트향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수업이 시작되면서, 왠지 모르게 코끝을 휘감던 (아마도 내 상상 속에서 나온) 민트향은 커다란 동작들과 숨을 몰아쉬는 소리, 땀 냄새와 함께 휘발되고 만다. 가끔 트레이너 선생님이 워밍업으로 다리 찢기라도 하는 날에는, 여기저기서 비명 소리가 들려온다. 그럴 때마다 ‘나는 절대 비명을 입밖으로 내지 않겠다’고 다짐한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스트레칭을 시도하지만 어느새 그런 다짐은 나도 모르는 새에 작은 비명으로 바뀌어 있다. 일상
본격적으로 오늘의 안무 진도를 나가는 시간, 젊은 여자 선생님이 걸스힙합 장르로 안무를 짜 오셨다. 오늘 오신 선생님의 안무 스타일은 내가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스타일이다. 학생일때부터 직장인이 된 지금까지 춤을 추긴 했지만, 전문 댄서가 아니라 그저 취미로 하는 아마추어인 데다가 탄탄한 기본기까지는 보유하지 못한 나는 비트를 굉장히 잘게 쪼개는 안무나 고난이도의 안무는 어려워하는 편이다. 대신 동작이 좀 크고 느낌을 살리는 안무를 배우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게 느껴진다. 어차피 느낌은 개개인의 몫이니까, 안무의 스타일을 살리면서 내 느낌을 최대한 담을 수 있도록 연습, 또 연습한다.
오늘따라 선생님이 선택해온 곡과 안무가 마음에 쏙 든다. 트렌디하기도 한데, 몸에 착착 배이는 동작들이라 그런지 유독 잘 외워지는 것 같다. 사실 나는 안무 외우는 속도가 그렇게 빠르지 않다. 그렇지만 내가 좋아하는 곡에, 어느정도 익숙한 스타일의 동작이 많이 들어가 있으면 외울 때 가속도가 붙는다. 오늘따라 이 곡과 안무가 그렇다. 느낌 좋은데, 오늘은 선생님 픽(pick)을 기대해봐도 되겠어, 라고 생각하면서.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떤 선생님들은 수업의 마지막에 수강생 몇 명을 ‘픽’해서 함께 영상을 찍는다. 그 날 수업에서 안무를 가장 잘 외웠거나, 느낌을 잘 살리고 있는 사람들이 그 날의 픽을 당할 가능성이 높다. 수업의 막바지 순간, 조별 촬영까지 끝난 후 괜히 가슴이 두근두근한다. 선생님이 연습실 안을 휙 스캔한다. 그리고 결정의 시간.
“여기 이렇게 여자분 둘, 저기 남자 한 분, 그리고 여기 여자분 둘 나오세요.”
선생님 손이 분명 날 가리켰다. 기분이 훅(!) 좋아지면서 두근거림의 강도가 더 올라간다. 오늘 수업 열심히 들은 보람이 있구나, 실수하지 말아야지. 선생님이랑 다른 네 명의 사람들이랑 카메라 앞에 선다. 오랜만에 당한(?) 픽이라 기분이 좋은지 텐션이 마구 올라간다. 실수없이 영상 촬영을 잘 끝냈다. 기분이 좋다. 영상을 받아보니 온통 다 검은색 의상인 사람들만 픽을 당했다. 심지어 선생님도 검은 색 옷차림이다. 온통 까망까망한데 괜히 오늘따라 검은색이 이뻐보인다. 오늘 수업도 정말 재밌었다. 선생님 픽을 당한 날이라 더 신이 났다. 그리고 수업이 끝난 후 짐을 주섬주섬 챙기며 다짐한다, 앞으로도 검은색 연습복을 챙겨 오리라고.
Ep 2. 집콕라이프에서 찾는 행복
주말 아침, 게다가 월요병이 찾아오려면 아직 24시간 이상이 남아있는 토요일 아침이다. 늘어져라 늦잠을 자고 싶기도 한데 어쩐지 열시밖에 되지 않았는데 눈이 떠졌다. 이 꿀 같은 토요일을 잠으로만 낭비하지 말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충만하게 누리라는 신호인 것인가. 세수를 대충하고 부엌에 어슬렁어슬렁 걸어간다. 뭘 먹어야 이 행복한 토요일에 잘 먹고 잘 살아냈다고 소문이 날까. 냉장고 안을 들여다보니 엊그제 SSEUK배송으로 도착한 양파, 양송이 버섯, 빨간 파프리카가 냉장고 맨 밑 채소 칸에 있고, 그 위에 있는 칸에는 비닐팩에 담긴 마늘, 그리고 썰어서 말려놓은 가지가 있다. 냉동실에는 얼마전에 감바스를 해먹고 남은 깐 새우가 몇 마리 있다. 아, 그러고 보니 찬장에 있는 파스타 면이 있는 게 기억났다. 올리브유도 넉넉하게 있다. 바질, 파슬리, 후추 등등 양념통들을 쳐다보다가 오늘의 메뉴를 정했다.
첫 번째로 할 일은 나의 베스트 요리 선생인 You튜브를 틀어 레시피를 확인하는 일이다. 그리고 나서 본격 요리에 돌입한다. 도마에 씻은 채소들을 놓고 송송 썬다. 양파를 채썰고, 양송이는 옆으로 송송, 파프리카는 반으로 갈라 씨를 긁어내고 깍둑 썰어준다. 마지막으로 마늘을 얇게 썰어주면 재료 손질이 끝난다. 냄비에 물을 넣고 끓이기 시작한다. 끓는 물에 면을 넣고 소금을 한 꼬집 집어넣는다. 이렇게 하면 면이 더 쫄깃해진다나. 동시에 옆 가스불 위에서는 둥근 프라이팬을 올리고 올리브유를 넉넉하게 부어준다.
올리브유에 기포가 슬슬 올라오기 시작할 때쯤 마늘과 양파를 투하한다. 마늘과 양파가 살짝 튀겨지면 옆에서 삶은 면을 가져와 프라이팬 안에 넣고 센 불에 빠르게 익힌다. 면이 익을 때쯤 양송이, 가지, 새우를 넣는다. 중간중간 재료들이 골고루 익도록 뒤집고 소금과 후추를 솔솔 뿌려서 간을 맞춘다. 새우가 살짝 익으면 파프리카를 마지막으로 넣고 잠깐 더 익힌 뒤에 불을 끈다. 그리고 볼록한 예쁜 그릇에 담아내면 내가 좋아하는 온갖 재료들이 들어간 새우 오일 파스타가 된다. 노란 파스타면 위에 가지와 파프리카로 예쁘게 색감을 잡고, 양송이 버섯과 새우가 올리브유와 어우러져 고소하다. 마늘과 양파는 느끼함을 잡아준다. 오랜만에 주말 특식 만들기에 성공하니 기분이 매우 좋아졌다. 지난 한 주 동안 고생하며 심히 힘들어진 몸과 마음을 위로받는 것 같다. 그래, 힘든 날이 있어야 좋은 날도 있는거지, 어떻게 만날 좋은 날만 있겠어, 라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가끔 행복이란 무엇일까 생각한다. 뭘 하고 살아야, 아니 어떻게 살아야 행복할까, 라는 밑도 끝도 없는 고민을 한다. 그렇지만 행복이 별 거 있나. 가지와 함께 돌돌 만 파스타를 입 안으로 들이밀다가 문득 아, 이런게 행복이지, 라고 머릿속으로 중얼거려 본다. 시계를 보니 열한 시가 훌쩍 넘어있다. 아침 겸 점심을 먹었으니 한 서너시쯤이면 또 슬슬 배가 고파지면서 또 메뉴 고민을 하게 되겠지. 그땐 어떤 음식이 이렇게 또 소소한 행복을 가져다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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