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것들을 접하다가 익숙하던 것들이 그리워지던 찰나에 돌아온 여행. 좀 더 즐기고 더 많이 볼걸 하는 아쉬움과 무사히 돌아왔다는 안도감이 교차하는 밤.
생각보다 나는 낯선 곳에서 잠을 깊게 자지 못했고, 예상 외로 낯선 곳에서 종이지도 한 장으로 길을 잘 찾아다녔고, 예전과는 다르게 낯선 음식과 물 때문에 탈나지 않았고, 생각보다 처음 본 이들과 잘 지내기도 했고, 잘 못 지내기도 했다.
국제 미아가 되지 않으려고 길을 조금만 몰라도 열심히 물어보고 다니는 내 모습에 새삼 놀라기도 했고, 친절한 현지인들에게 감사해하기도 했다. 하루가 끝나면 피곤에 지쳐 사진 업뎃은 마음처럼 빠릿빠릿하지 않았다. 생각보다 동유럽은 아름다웠고, 마지막 체스키와 부다페스트에서의 나홀로 일정은 쓸쓸하기도 했지만 고요하고 평안한 그 침묵을 깨고 싶지 않기도 했다.
길고 짧은 여행에서 일상으로 돌아와 그리웠던 것들과 재회하는 동시에 이제 다시 현실을 살아낼 준비를 한다. 눈앞에 닥칠 일들, 겪어내고 감당해야 하는 것들이 빤히 보이기에 도망치고 싶지만 이것들도 곧 지나가리라. 방금 끝나버린 이 여행처럼.
-유럽여행에서 돌아온 다음 날, 2016년 7월 16일 이른 새벽
여행에서 돌아온 바로 다음 날의 이른 새벽, 시차적응이 안되어 깨어났을 때 문득 여행에서 느낀 소회를 기록해놔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곧바로 폰을 들고 여행하면서 느꼈던 감정들과 생각들을 줄줄 써내려갔다. 새벽감성 덕분이었는지, 여행하는 동안의 기억과 느낌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르면서 글이 술술 나왔던 것 같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그 동안의 여정과 기억들을 떠올리고, 또 그 후에 다가올 일들에 대해 마음을 다잡으며 다짐했던 것들이 어느샌가 머릿속에 저런 내용으로 죽 정리되어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대학원 다니면서 방학에 유럽 단기 써머스쿨을 다녀온 적이 있다. 체코 프라하에서 일주일 가량 머물면서 써머스쿨을 수강했고, 스쿨 일정 앞 뒤로 각각 며칠 동안 유럽의 몇몇 도시를 돌아다녔다. 인생에서 첫 유럽여행이기도 했고, 총 2주 반 가량의 기간 중 써머스쿨 기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절반을 혼자 다니는 여정이라 설렘 반 두려움 반으로 비행기를 탔었다. 그렇게 다녀온 유럽에서의 여정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서 블로그를 시작하기도 했다. 이때 나의 여행은 미리 준비해갔던 유심이 불량이었던 덕분에(?) 가이드북의 종이지도와 현지인들의 친절한 안내에 거의 99%를 의존했던 기억이 있다. 그럼에도 첫 유럽행에 신이 났다. 때로는 더위에 힘이 부쳐 카페에 앉아 쉬기도 했고, 그러다가도 좀 더 많이 보고싶다는 마음에 아픈 다리를 이끌고 몇시간을 걸어다니면서도 힘든 줄을 몰랐다.
혼자 떠났던 여정은 조금 불편하기도 하고 외롭기도 했다. 예를 들면 카페나 식당에서 화장실을 다녀오고 싶은데 짐을 봐줄 사람이 없다거나(우리나라처럼 카페에 노트북, 책, 핸드폰 등등 소지품 놓고 다니면 큰일남..), 맛집을 찾아서 메뉴를 여러 개 시켜보고 싶은데 그럴 수 없을 때는 혼자인게 조금 아쉽기도 했다. 헝가리 부다페스트 마지막 날에 숙소 근처에 있는 굴라쉬 맛집을 찾아갔는데, 다른 메뉴를 시켜도 어차피 많이 먹을 수가 없을 것 같아 굴라쉬와 빵만 주문해서 먹고 나왔을 때가 제일 아쉬웠다.
그렇지만 혼자 하는 여행은 나름 재미있었다. 같이 여행 가서 모든 일정을 함께 한 사람은 없었지만, 대신 새로운 사람들과 뜻밖의 인연을 맺기도 했다. 파리에서는 한인민박집에서 만난 동생과 함께 하루 종일 파리 시내를 돌아다녔고, 나중에는 한국에 돌아와서 조우하기도 했다. 또 그 당시에 파리의 한 게스트하우스에서 일하면서 머물고 있던 아는 동생과 약속을 잡아 노트르담 성당 앞에서 만나기도 했다. 마침 내가 간 파리에 한국에서 알던 동생이 머물고 있었다니, 그것도 생각하면 참 신기한 일이다. 신기했던 일은 또 있었다. 파리의 민박집에서 만난 다른 동갑내기 친구는 그 당시 프라하의 한 예술 학교에서 유학을 하고 있었다. 그 친구와 파리에서 연락처를 주고 받은 뒤, 나중에 프라하에서 써머스쿨 일정 중간에 한 번 만나 저녁을 같이 먹기도 했다. 프라하에서 써머스쿨 일정이 끝나고 나서 혼자 체코의 소도시 체스키크롬로프를 갔을 때는 같은 민박집에서 만난 중국인 언니 두 명과 함께 체스키 시내를 돌아다녔다. 첫 유럽행이 혼자라서 외롭다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돌이켜보니 새로운 사람들과 인연을 맺은 소중하고 특별한 추억들이 남아 있었다.
거의 종이지도 한 장에 의존해서 돌아다니니 현지인들에게 길을 물어봐야 하는 상황도 종종 생겼다. 파리에서 한 파리지앵에게 프랑스어로 길을 물었는데, 내가 어찌나 버벅버벅했는지 그 사람이 영어로 답을 해주었던 굴욕적인 기억이 있다.(ㅠㅅ ㅠ..) 약간 기가 꺾였지만 내 발음을 프랑스인들이 알아들을 때까지 시도해보리 라는 꽁-한 오기를 가지고 꿋꿋이 프랑스어로 길을 묻고 다녔고, 결국 몽마르트 언덕과 물랑루즈를 보고 나서 숙소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한 친절한 릴(Lille) 출신의 프랑스인 아주머니와 프랑스어로 더듬더듬 대화를 이어갔던 기억이 있다. 그분은 다행히도 내 프랑스어를 끊지 않고 참을성 있게 잘 들어주었다. 답도 다른 언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해주었다. 지금 생각하니 그걸 용케 알아들었던 나 자신이 신기하다. 그 아주머니는 파리에 잠시 왔다가 지방으로 돌아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북역(Gare du Nord)에 가는 길이라고 했다.
체스키크롬로프에서 숙소를 찾아갈 때는 길이 좀 어려웠는데, 홀로 사이클링을 하던 남자분이 지도를 보고 나를 친절하게 숙소 앞까지 데려다 주었던 기억이 있다. 마지막 행선지인 부다페스트에 도착했을 때에는 해가 져서 거의 밤이 되어 있었다. 깜감해진 데다 정류장에서 미리 알아보고 간 버스의 노선이 보이지 않아 당황했던 나는 같은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한 여자분에게 숙소 이름을 대면서 여기를 가는 버스를 검색해달라고 부탁했고, 그 분은 자기가 탈 버스를 놓치면서도 친절하게 내가 탈 버스를 알아봐주고 내가 버스를 탈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헝가리 사람들이 대체로 좀 표정이 없달까, 약간 무뚝뚝해보이는 면이 있는데, 내가 만난 헝가리 사람들은 외국인인 나에게 대체로 친절했다.
혼자였던 시간이 많았던 첫 여행에서는 스스로 헤쳐나가야 할 일들이 많았다. 혼자이기에 밤늦게 돌아다니지 않고 가방은 항상 앞으로 꼭 메고 다니는 등 안전에 유독 신경을 썼고 덕분에 유럽에서 많이들 당한다는 소매치기는 한 번도 당하지 않았다. 인종차별적인 언사를 들은 적은 별로 없었지만 딱 한 번 '유럽에 인종차별이 존재하긴 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프라하에서 체스키크롬로프로 간 첫 날, 한 무리의 백인 남자들이 우르르 옆을 지나가다가 나를 쳐다보면서 자기들끼리 큰소리로 뭐라뭐라 떠들고 웃는 모습을 봤다. 너무 노골적으로 나를 쳐다보는 바람에 그 조롱의 대상이 나라는 것을 모를 수가 없는 상황이었고, 헝가리 말이라 알아들을 순 없어도 뭔가 나를 괄시하고 놀리는 듯한 대화라는 건 느낌으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이게 말로만 듣던 인종차별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예상외로 침착하게 그 옆을 통과할 수 있었는데, 그건 아마 대화의 내용을 정확히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못 알아들으니 굳이 신경을 쓰지 말자는 생각이었나. 여튼 처음 겪는 인종차별적인 행동 앞에서도 의외로 나는 담담했고, 그냥 개무시(!)를 했던 덕분에 마음을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그렇게 홀로 여행을 하면서 발견한 나는, 처음 만난 사람들과도 생각보다 어색하지 않게 지낼 수 있는 사람이었고, 모르는 길이 나오면 버벅대는 대신에 바로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길을 물을 수 있는 용감무쌍한(?) 사람이었다. 국제미아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건다는 두려움을 압도해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ㅎㅎ.. 하루에 여덟 시간을 뚜벅이로 돌아다녀도 생각보다 지치지 않았던 의외의 강철체력을 발견하기도 했다. 너무 힘들면 잠시 쉬었다가 다시 일어날지언정, 많은 것을 눈에 담고 지금 보이고 들리는 모든 순간을 놓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정말 열심히 돌아다니는 열정적인 나의 모습도 발견했다. 한국에서 출발하던 날 공항까지 따라오셨던 엄마는 처음으로 혼자 보름 넘게 해외로 나가는 딸래미 걱정을 한 가득 하고 계셨지만 나는 너무나 안전하게, 그리고 혼자서도 신나게 여행을 즐기고 왔다.
여행은 나의 새로운 면모, 나 자신도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나의 다른 면모를 발견하게 해주었다. 나는 안전에 대한 주의는 늘 하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늦게까지 그리고 구석구석을 돌아니면서 새로운 것들을 보고 싶어하는 적극적인 사람이었고, 낯선 곳에서도 여러가지 수단으로(종이지도와 현지인 sos) 길을 찾아다니며 생존본능과 현지 적응력이 강한 사람이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덕분에 어딜 가든 국제 미아는 될 것 같지 않다는 자신감이 생겨서 그 뒤도 또 혼자서 해외여행을 다녀왔다.(지금은 갈.. 수.. 없는.. 오키..나..와...) 내가 어디서든 잘 돌아다닐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 그것이 내가 그 뒤로도 가끔 여행을 훌쩍 떠나는 이유가 아닌가 한다. 또 덕분에 언젠가는 먼 곳, 예를 들면 쿠바나 모스크바 같은 도시들을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기도 했다.(말은 통하지 않아도 국제미아가 될 두려움은 없으니 어디든 갈 수 있다!)
무엇보다도 여행이 좋았던 건, 낯선 곳으로 떠나 새로운 것들을 보고 듣는 지금 이 순간 혹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비행기 창문을 바라보는 순간조차도 모두 충실하게 즐기는 법을 배울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는 점이다. 날마다 이어지는 기다란 일상의 길이에 비하면 아무리 긴 여행의 길이도 참 짧게 느껴진다. 그 시간을 온전히 즐기는 법, 그리고 또다시 일상을 살아나가다가 모든 것이 지리해질 때쯤 잠시 모든 것을 접어두고 훌쩍 떠날 줄 아는 여유를 가지는 것, 그것은 여행이 나에게 가르쳐준 하나의 삶의 방법이었다. 꼭 멀리 떠나지 않아도 마음을 달랠 수 있는 곳으로 나 자신을 데려가기도 한다. 분주하고 힘든 일상을 가끔은 잠시 한 걸음 밖에 나와서 바라보게 해주는 것이 바로 여행이었다. 그렇게 본다면 여행은 어떤 중요한 일이나 고비를 한 차례 겪고 난 후에, 마음을 달래고 치유할 수 있는 좋은 방식이 아닐까. 올 해에도 그리고 그 다음해에도 그렇게 할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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