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를 박차고 나왔어야 했다.
언제 한번 영화 보러 갈래요?
손 한 번 줘볼래요? (...) 그냥 한 번 잡아보고 싶었어요.
누군가에게서 들었으면 기분이 좋았을법도 했던 그런 말들은,
적어도 당신에게서는 듣고 싶지 않았다.
당신은 한 여자의 남편이고, 한 아이의 아빠니까.
그 사람은 지난 겨울, 그러니까 대략 1년 전쯤 내가 어떤 일로 도움을 요청했던 사람이었고, 흔쾌히 나의 부탁을 들어줬었다. 사례비를 고민하는 나에게 돈은 됐다고 하면서, 대신 나중에 어떤 식사 자리에 동행을 해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특이하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받은 호의에 당연히 그렇게 해드리겠노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얼마 전, 연락이 왔다. 코로나 때문에 연락이 늦었는데, 이번 주말에 저녁식사 자리에 나올 수 있느냐고. 당연히 이전에 했던 그 약속이라고 생각했고, 누군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제 3자가 오는 자리라고 여겨서 약간은 포멀한 옷을 차려입고 나갔다. 약속장소에 도착했을 때 내가 생각했던 그 제 3자는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알고 보니 둘이서 식사를 하자고 부른 것이었다. 부담스럽긴 하지만 어른이 불러주신 자리에, 그것도 나에게 호의를 베풀어줬다고 생각하는 사람 앞에서 홱 돌아서 나올 수는 없었으니 한 끼정도 같이 하면서 근황토크나 하고 나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예상대로 최근 들어간 직장 얘기 등 근황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한 시간쯤 지났을까,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들이 튀어나왔고 난 매우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알콜이 약간 들어간 상태였지만 취하지는 않았고 다행히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불쑥 솟아오른 혼란은 그의 이상한 말들과 함께 계속 이어졌다.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하려고 한다. 어쨌든 나는 좋게 좋게 웃으면서 그의 제안들을 거절했고 건물 앞에서 헤어진 다음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버스 정류장으로 내달렸다. 버스에 몸을 싣고 나서야 심장이 쿵쾅거리는게 느껴졌다.
나에게 호의를 베풀어줬었고, 그 때 그 순간에도 어쩐지 나에게 베풀고 있는 것 같고(생각보다 훨씬 비쌌던 식사비를 결제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나중에 밥을 사야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깊게 잘 아는 사이도 아니었지만 괜찮은 분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에게, 뒷통수를 한 대 세게 맞은 듯한, 그런 기분이었다.
지금 내가 화가 나는 것은, 생전 처음 겪는 상황에 당황스러워 웃음으로 무마하거나, 그 사람의 이상한 말들에 대해 굳이 어떠한 판단은 보류하겠다는 태도로 대응했던 나 자신이다. '제가 왜 당신이랑 영화를 보죠...?'라고 반문하지 못했던 나 자신이다. 바로 정색하고 그 자리에서 불편함을 표시하지 못했던 나 자신이다. 이 일을 몇몇 지인에게 털어놓았더니, 한결같이 '미친놈이네'라는 반응이 돌아왔다. 그나마 주변에서 너의 잘못이 아니라고, 잘 빠져 나왔다고 해주는 위로를 들으며 혼란스럽고 찝찝한 마음을 가라앉히는 중이지만 사실 쉽지 않다. 무엇보다, 스스로를 물러터졌다고 셀프 채찍질을 하는 걸 멈추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동시에, 지금도 뇌리에서 떠나지 않아 트라우마처럼 작동하면서 문득문득 온몸에 소름이 끼치게 만드는 이 사건을, 이 기억을 남겨놔야겠다고 결심했다. 무엇보다도, 이 일을 주변에 털어놓자 '나도 그런 적 있어'라며 비슷한 유형의 피해들을 겪은 지인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기 때문이다. 운이 좋았던 것인지, 나는 직접적으로 성추행을 당하거나 지속적인 성희롱을 겪은 적은 없었던 것 같지만 문득 되돌아보면, '아, 그게 성희롱이었구나' 싶은 일들이 있다. 주변의 지인들도, 막상 당할 때는 몰랐지만 알고보니 그저 가벼운 농담이 아닌 성희롱이었음을, 때때로는 그것이 수직적인 권력관계를 이용한 강압이었음을 알게 된 사례가 많았다. 이 포스팅을 작성하며, 나는 앞으로 이런 상황에서 좀 무섭고 불편할 수 있지만, 움츠러들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람은 되지 않겠다는 다짐을 스스로 해 본다. 그리고 다시는, 호의라는 가면 뒤에 숨어서 불쾌하고 비윤리적인 언어들을 누군가가 나에게 내뱉는 행위를 용인하지 않겠다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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