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당당 90년생의 웃프지만 현실적인 독립 에세이

[9평 반의 우주]

 

나는 스무 살 때부터 기숙사와 사택을 전전하며 살아왔다. 서울에서 조금이라도 싼값에 지내기 위해 아침 체조 같은 전근대적 규율을 열심히 수행했고, 룸메이트와의 갈등 없는 생활을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힘들 때마다 서울의 무서운 집세를 떠올리며 주문을 외웠다. 노 머니, 노 독립. 그러나 영원히 '프로 긱사꾼'으로 살 순 없는 노릇. 상경 7년차를 한 달 앞둔 겨울, 나는 독거 인간이 되기로 결심했다.
혼자 사는 것의 가장 큰 매력은 당연히 내 멋대로 집을 꾸밀 수 있다는 점일 테다. 컵 하나부터 매일 덮고 자는 이불까지 마음에 쏙 드는 걸로 채워 넣으리라 다짐했다. 지르고 싶은 인테리어 소품들을 핀터레스트에서 잔뜩 캡처한 후 머릿속에서 배치했다가 들어내기를 반복했다. 내 취향과 방식으로 가득 찬 나의 우주. 진정한 독립이란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거라 믿었다. 
하지만, (불길한 역접 접속사의 등장으로 눈치챘겠지만) 그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이삿날 오후, 딸의 첫 자취집을 시찰하기 위해 올라온 부모님은 신발을 벗자마자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지지고 볶으며 20여 년을 함께 해온 2인 1조의 팀워크는 진정 눈부셨다. 엄마는 큰방 한쪽 벽에 행거부터 세웠고, 아빠는 책상을 조립했다. 
아니, 아직 거기 뭐가 들어갈지 모르는데! 거침없는 손길을 저지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사이, 내 의도와 전혀 상관없는 가구 배치가 완성되었다. 고향 집에서처럼 책상과 책장이 맞물려 기역자로 놓였고, 전신 거울을 놓으려던 자리는 커다란 서랍장이 차지했다. 초등학생 때 썼던 좌식 테이블까지 깜짝 등장해 정신이 더욱 혼미해졌다. 용기를 내어 창문 쪽으로 침대를 붙이고 싶다고 의견을 피력했으나.... 
"화장실 쪽으로 머리를 두면 안 좋다!"
(..) 
우윳빛 커튼에 대한 로망은 아빠의 불호령으로 좌절됐다. 
"네가 흰색 천을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냐?"
팩트 폭행에 머리가 멍해진 사이, 엄마가 황동색 블라인드를 날치기로 계산하려 했다. 이외에도 그릇, 수저 세트, 쓰레기통, 욕실 슬리퍼, 발 매트 등등 취향 주권을 지키기 위한 사투는 계속됐다. 
집에 돌아와 무채색 전리품들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신고식을 치른 느낌이었다. 마음에 쏙 드는 나만의 우주를 만들기 위해 꼭 거쳐야 할 관문. 나를 가장 사랑하고,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노'를 외치는 것. 까다롭게 구는 딸에게 조금 서운했을진 모르지만 부모님도 조금쯤 깨닫지 않았을까? 품 안의 자식이 어느새 자기 세계를 꿈꾸는 어른이 됐다는 걸. 아무리 못 미덥고 마음에 안 들어도 이제는 진정 '취존'해야 한다는 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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