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에 들어간 첫 학기에 planning for uncertainty and risk 라는 과목을 들었는데, 그 수업에서 무슨 내용을 배웠었는지 기억을 되살려 볼 일이 생겼다. (대학원에서 열심히 공부한 것 같긴한데.. 수업시간마다 당최 뭘 배웠는지 기억이 희미해지고 있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래서 수업 때마다 제출했던 에세이를 살펴보던 중에 이미테이션 게임[The imitation game(2014)](우리나라에서는 2015년 2월 개봉)이라는 영화 이야기를 써놓은 에세이 한 편을 발견했다. 안그래도 영화 관련 포스팅을 곧 올리고 싶었는데ㅋㅋ 이게 웬 떡이냐(!) 그래서 이번 포스팅은 그때 제출한 에세이 내용에 주로 기반을 두고 작성됐다.
이 수업에서는 불확실성(uncertainty)와 위험(risk)를 측정하고 위험 관리를 위한 결정을 내리는 과정에 대한 사회학적 이론이나 연구들에 대한 내용을 많이 다뤘었다. 위험관리라고 하니 왠지 위험요소를 측정하고 뭔가 위험 가능성을 숫자로 표시하는 방식을 배우는 등의 소위 '이과'스러운 내용을 배웠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실은 거의 사회학 이론에 기반해서 소위 매우 '문과'스러운 방식으로 현대 사회에 존재하는 위험에 대해 분석하고 비판하는 내용이었던 것 같다. 막판에는 울리히 백, 막스 베버 같은 사회학자들의 저서를 읽으라 해서 엄청 진을 뺐던 기억이.... (심지어 울리히 백은 양이 너무 많아서 번역본을 읽으려는 꼼수를 쓰다가, 번역이 너무 엉망진창이라 원서로 다시 돌아갔다는 슬픈 이야기)
여튼 수업이 너무 터프해서 눈물 쏙 뺀 이야기는 차치하고, 이미테이션 게임이라는 영화 이야기를 수업에 제출하는 에세이에 썼던 이유는 이 영화가 위험 평가(risk assessment)와 위험 관리(risk management)가 현실에서, 특히 제 2차 세계대전 같은 극한 상황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람의 목숨 대(vs) 전쟁에서의 전략적 승리' 중 어떤 쪽이 더 우선시 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영화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사실 이 영화의 감상평에는 주로 앨런 튜링(베네딕트 컴버배치)의 인간적인 외로움과 고뇌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은데, 수업에서 제출한 에세이에는 수업과 관련된 내용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앨런 튜링의 위험 평가자로서의 역할에 좀 더 비중을 두어서 썼던 것 같다.
제 2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을 비롯한 연합군은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독일 나치의 군대를 상대하고 있었는데, 독일을 이기기 위해서는 그들이 가진 강력한 군사 암호체계(anigma)를 풀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영국 정부에서 앨런 튜링을 비롯한 전국의 천재 수학자들을 모아 몇 년 동안 독일의 애니그마를 풀어내기 위해 노력하고, 결국 튜링과 조안(키이라 나이틀리)을 비롯한 수학자들은 암호해독 기계를 발명해낸다. 이 기계가 바로 '튜링머신', 즉 세계 최초의 컴퓨터라고 한다.
하지만 튜링은 암호를 즉각적으로 해독해서 공격을 막아내면 독일군이 자신들의 암호체계 시스템이 밝혀졌음을 인지하고 새로운 암호체계를 만들어낼 것을 우려했다. 그래서 결국 암호해독기를 만들어내고도 장장 2년동안 매일 전투에서 누가 죽고 누가 살지 전략적인 결정을 내려야 했고 결국 연합군의 승리를 이끌어낸다. 말이 전략이지, 사실은 거기에 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달려있었음을 생각하면 상황실에서 암호를 풀고 있던 수학자들의 마음이 결코 편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후 전쟁은 2년 더 지속되었다. 그리고 매일 우리는 피로 물든 계산을 해야했다. 누가 살고, 누가 죽을 지 결정했다. 매일 우리는 연합군의 승리를 도왔지만, 아무도 알지 못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아르덴 전투, 노르망디 상륙작전, 그 모든 승리들이 우리가 제공한 정보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어디서 어떻게 공격이 시작될지를 아는데도, 독일군이 암호체계를 들켰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새로운 암호체계를 만들어내어 그동안의 암호해독 노력이 물거품이 되고, 결국 전쟁이 장기화되어 더 큰 피해가 발생하는, 그런 더 큰 위험을 피하기 위해 매일 '오늘은 누가 죽고 누가 살아야 할지' 결정해야 하는 위험 평가자이자 위험 관리자였던 앨런 튜링과 동료 수학자들의 상황은 인간적으로 참 잔인했다. 영화를 본 지 꽤 오래되어 기억이 정확하게 나지는 않지만 중간에 한 동료 수학자의 가족 한 명이 전투에서 전략적으로 죽어야 하는 상황이 있었다. 전체 연합군의 승리를 위해 결국 가족을 희생시켜야 했던 그 수학자의 심정이 대체 어땠을지 상상하기 어렵다. 개인에 초점을 맞추었을 때에는 앨런 튜링의 인간적인 면모와 외로움, 당시 호모섹슈얼에 대한 사회의 시선과 핍박, 수학자로서의 천재성, 시대 상황에 초점을 두고 보면 인간의 생명마저 위험 관리항목과 전략의 한 부분으로 들어가는 전쟁의 잔인함을 느낄 수 있었던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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